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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의 삶/OFF의 나날들

[OFF] 잃어버렸던 나를 찾아보려 한 하루

지난주부터 오프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너무나도 힘들었다. 3일 오프 동안 계속 울고 혼났던 잔상이 잊히지 않고 정말 우울에 빠져 지냈었다. 열심히 하려고 다시 마음을 잡았지만 또 실수를 하고.. 그리고 정말 일과 기숙사만 내 인생에 남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내가 알던 나는 이미 잃어버린 뒤였다.

 

나는 미술관, 박물관에 가는 것도 참 좋아했고 맛있는 음식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는 것도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기숙사에 혼자 있는 게 더 편해졌고 밖으로도 나가기 싫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만 둘 게 아닌 이상, 이 시기를 극복해 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던 걸 다시 시작해 보려고 다짐한 첫 오프였다.

 


내가 알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 보았던 하루

 

이브닝 근무가 끝나고 기숙사방을 청소하고 빨래도 돌리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가고 있었다. 항상 이브닝 끝난 후 오프는 쉬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늦게 자는 것 같다. 내일 당장 내가 좋아하는 전시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을 찾다가,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내가 자주 가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박수근 전시 소식을 듣고 사전예약을 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오후 12시가 거의 다 되어있었다. 거의 6시간 정도를 잔 것 같다. 잠을 좀 늦게 자고 덜 자도 근무를 하는 날이 아니어서 심적 부담도 적고 그래서인지 몸도 가벼웠다. 그런데 나의 모든 신경은 병원에서의 실수, 걱정으로 향해있어서 이번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현장 간호사 선생님께 연락을 취했고 오후 5시에 간호사 상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의 자유를 즐기러 가는 길이었지만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몇 번이나 울 고비를 넘겼다.)

 

 

3년 전부터 전시도 볼 겸 분위기도 즐길 겸 덕수궁을 자주 방문한다. 항상 덕수궁은 사계절마다 2~3번은 넘게 왔는데도 언제나 아름다운 곳.. 예전에는 서양화가들의 전시를 가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들의 화풍, 삶을 더 많이 접하고 좋아했었는데 약 2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에서의 프로젝트 전시 광장 1, 2, 3과 작년 11월 전시 [박래현, 삼중 통역자]를 보고 근대미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장 1부에서 본 화가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아마 나를 한국 근대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화가 박수근. 나도 화가의 이름은 알았지만 작품과 화가의 이름이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를 보고 오니 연결이 되고 그의 아내가 쓴 "박수근 아내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삶을 더 알고 싶었다. 유화로 작품을 그리지만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모든 작품마다 보여주고 있다. 작품들을 보고 느낀 점을 한마디로 간결하게 정리하기 힘들었는데 전시장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박수근의 그림은 창문 용지로 사용되는 까칠한 한지.

즉 창호지와 같은 질감을 낸다.

그의 더 커다란 화폭들도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조각의

우툴두툴한 표면과 유사한 효과를 자아낸다.

 

그의 기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박수근의 그림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한국적 정서가 담겨있다."

 

-천승복,[코리안 리퍼블릭] 1962.02.03-

 

내가 느낀 점을 이렇게나 명확하게 표현해 내다니.. 작품에 사용된 색감도 정말 절제해서 사용했고 농촌의 풍경과 그 속의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남겨 밀레도 떠올랐다. 전시를 마치고 덕수궁 뒷문으로 향했다. 작년 석조전 전시 [대한제국 황제의 궁궐]에서 돈덕전에서의 고종과 왕세자 시절의 순종 사진을 보고 돈덕전에 흥미가 생겼다. 그 후 돈덕전 복원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분명 이번 연초에 방문했을 때는 9월이면 복원이 끝난다고 적혀있었는데 날짜가 내년까지 넘어가 있었다... 뭐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벌써 11월이 되었으니 내년 9월도 금방 오겠지.. (나도 그때쯤이면 이제 1년 차이려나.. 시간 제발 빠르게 흘러줘)

 

 

상담을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하.. 병원.. 나의 일터.. 현장 교육간호사 선생님께서 자신을 언제 찾아줄까 많이 기다렸다고 하셨다. 사실 4개월 차에 신규 간호사들이 많이 힘들어한다고.. 그리고 분명히 힘들 텐데 내가 선생님을 찾지 않아서 걱정도 하셨다고 한다. 정말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한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선생님에게 털어놓으니 나 혼자서만 울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보다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걱정도 말하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나갈 수 있게 도와주셔서 실수를 많이 하고 와서 다음 근무가 두렵지만 부딪혀보자는 자신감을 다시 갖게 했다.

 

1) 나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선생님들이 더 힘들어지고 내가 없을 때 병동이 더 잘 돌아가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짐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더니 "선배가 왜 존재할까요?"라고 운을 떼시며 너무 혼자서만 업무를 다 떠안고 하려고 하지 말고 도움도 요청해도 된다고 하셨다. 정말 생각해 보면 우리 병동이 정말 힘들기에 내가 내 업무를 다 완벽하게 떠안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감당이 안 되면 도움을 요청해서 일을 해결해도 된다고 하시니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2) 알려준 업무를 바로 완벽하게 하고 싶은데 3~4번은 반복해야 제대로 할 수 있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럴수록 더 실수만 한다고 말했더니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처음 나를 봤을 때 업무에 대한 열의가 넘쳐서 보기 좋았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실수를 하고 일을 하면서 얻은 경험치는 쌓아나가는 것이기에 한 번에 그 중간 단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고. 차근차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괜찮다고 해주셨다.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이 주신 과일음료를 들고 내가 아끼는 C을 만나러 갔다. 내가 도착할 때쯤 일을 끝내고 내려왔고 넷플릭스로 RED NOTICE를 보며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해서 일단 근처 이마트로 향했다.

 

영화에는 팝콘이기에 팝콘을 사려고 했는데 전자레인지용 팝콘은 이제 잘 안 나오나 보다.. 너무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둘러보다가 제과를 너무 좋아하는 C.. 사실 여기에 쿠키를 사러 온 것이기에 둘러보다가 빵 한 박스랑 오렌지필 페이스트리 & 초코칩이 박힌 페이스트리를 구매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오늘 소보로빵과 우유 밖에 안 먹은 거다! 저녁으로 또 빵을 먹기는 좀 그래서 죠스 떡볶이를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다시 품게 되었고 영화를 보며 작은 파티를 열 예정이라 (먹보 파티~ 빵 냠냠냠) 기분이 좋았다.

 

계산을 하러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눈에 보였고 빨간색과 초록색이 보이는 순간 마음이 확 따뜻해졌다. 왜 크리스마스만 생각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지.. 영화도 보고 맛있게 빵도 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영화 레드 노티스 반전이 많아서 놀랐고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였다 ㅎㅎ 내일은 진짜 영화관에 가서 이터널스를 보고 카라멜 팝콘을 먹어야지! 그리고 할로윈 때 마녀 주방 가려고 했는데 오프 전날에 뺏겨서 못 갔다. 한 달 정도 늦었지만 내일 꼭 가리라~